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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티크’ 씁쓸 달콤한 네 남자의 상처

 
13일 개봉하는 영화 '앤티크'는 일본에서 17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만화 '서양 골동 양과자점'이 원작이다. 일본에서는 TV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4년 전 이 만화가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충무로는 순정만화와 동성애 코드, 케이크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뒤섞인 이 까다로운 원작이 어떻게 새 옷을 갈아입을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각색과 연출을 담당한 민규동(38) 감독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년)로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았던 충무로의 대표 성장주(株). 그는 드라마와 코미디·뮤지컬·미스터리·호러 등 여러 장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섬세한 연금술로 대중영화의 문법 안에 이 야생마와 같은 원작을 성공적으로 재탄생시켰다.

최근 '꽃보다 남자''공부의 신''설국열차'등 일본 만화와 소설이 앞다퉈 국내 스크린과 TV에 옮겨지고 있는 가운데, '앤티크'는 이같은 '일류(日流)'의 성공사례 중 하나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원작자 요시나가 후미는 장르 혼합이 주가 된 각색에 대해 상당한 만족감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네 남자의 상처와 치유=만화 속 케이크 가게의 빨간 페라리가 57년산 피아트 500(친퀘첸토)으로 바뀐 것 빼고는 원작의 기본 설정은 대부분 유지했다. “여자 손님이 많으니까”라며 케이크 가게 '앤티크'를 차린 재벌 2세 진혁(주지훈), 천재 파티셰(빵 만드는 요리사)이자 게이 선우(김재욱), 최연소 동양챔피언 출신 기범(유아인), 진혁네 집의 가정부 아들이자 진혁의 경호원 수영(최지호). 이들이 '앤티크'의 네 남자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한 가지씩 말 못할 상처를 갖고 있는 게 이들의 공통점. 진혁은 어린 시절 유괴를 당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중요한 대목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 성인이 돼서까지 악몽에 시달리며, 그런 그를 부담스러워한 여자 친구들은 모두 그를 떠난다. 이 남자 저 남자와 닥치는 대로 하룻밤 사랑을 나누는 '마성의 게이' 선우는 어머니의 잦은 불륜 때문에 여성을 몹시 두려워하고 남자들과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기범은 각막박리증 때문에 권투를 포기했다. 수영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며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앤티크에서 부대끼는 동안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나아가 다독이는 관계로 발전한다.

민규동 감독은 지난달 30일 가진 인터뷰에서 “시간이 오래될수록 가치 있는 앤티크(골동품)와, 갓 구워냈을 때는 너무나 맛있지만 얼른 상하고 마는 케이크의 대비를 인생에 비유한 점, 삶이 갖는 절박함과 슬픔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 등을 원작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그는 “발랄해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상처를 지닌 사람들의 다층적 이야기를 장르 혼합을 통해 다양하고 풍성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동성애 코드 어떻게 표현했나=이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 '남자들끼리 키스하는 영화'로도 화제가 됐다. 그러나 '퀴어 무비(동성애 영화)'로 부르기에는 표현 수위가 상당히 낮다는 게 민 감독의 설명. 남자들의 애정 표현 장면이 빈번하지만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유쾌한 웃음을 이끌어내는 쪽으로 처리된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원작의 “나는 마성의 게이” “한번 찍은 놈은 다 훑어서 쪽쪽 빨아먹고 지져먹고 너덜너덜해지면 그냥 갖다버리는 저질스러운 놈”등의 노골적인 대사도 그대로 옮겨졌지만 크게 튀지 않는 수준이다.

배우들이 처음부터 동성애 설정에 적응한 건 아니었다. 수영 역의 최지호는 침대에서 선우와 키스하려다 들키는 장면을 어렵사리 리허설한 후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한때 지방으로 잠적하기도 했다. 선우를 연기한 김재욱도 촬영 전에는 “전국의 동성애자들이 선우에 푹 빠질 만큼 실감나게 연기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전에서는 NG를 연발했다.

◆제5의 주인공, 케이크=프랑스(이혜임)·일본(손기화) 등에서 경력을 쌓은 파티셰들로 이뤄진 케이크 디자인팀이 촬영장에 상주하면서 케이크를 즉석에서 만들었다. 영화를 위해 제작된 케이크는 1000여 개. 조각으로 등장한 숫자를 따지면 3000여 개에 달한다. 뮤지컬 퍼포먼스 장면에 등장하는 케이크만 400개다. 폭 3m, 길이 8m 탁자를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리지 않고 디자인팀 5명이 일주일 밤낮을 매달려 모두 만들었다.

정성스레 만든 케이크가 높은 조명 열에 녹거나 모양이 변해 다시 만들기도 부지기수. 케이크는 완성됐는데 다른 이유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거나 일정이 변경돼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을 경우 한번 베어문 케이크는 다시 쓸 수가 없어 나중에는 케이크를 먹지 않는 설정으로 바꾸기도 했다. 케이크 디자이너 손기화씨는 "촬영과정이 워낙 힘들어 제작진 사이에서 '다시는 케이크 소재 영화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비명이 터져나왔을 정도” 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