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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같은 생각에 살 붙인 건 李 감독 능력"

 

◇이경미 감독(왼쪽)과 박찬욱 감독은 영화 ‘미쓰 홍당무’ 감독과 제작자로 만나 환상의 호흡을 보여줬다.
16일 개봉한 ‘미쓰 홍당무’는 왕따를 둘러싼 색다른 시선을 선보인다. 주인공 양미숙은 모든 콤플렉스가 집약된 유례없는 인물이다. 이 문제적 인간을 만든 이는 바로 이경미 감독과 제작자 박찬욱 감독이다. 1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들을 만났다. 박 감독은 차기작 ‘박쥐’ 편집으로 한창 바쁘지만 후배 감독을 응원하기 위해 일부러 나섰다.

“100% 상상의 산물입니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개인적 경험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전 양미숙과 정반대 스타일이며 왕따도 아니었어요.”

양미숙은 우울증과 소심증, 건강 염려증, 과대망상증 등 현대인이 가질 법한 증후군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여고 교사다. 게다가 흥분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까지 갖고 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적극적이다. 마치 “왕따 시켜도 상관없다. 난 내 식대로 살겠다”는 투다. 이경미 감독은 캐릭터가 자신과 무관한 가공의 인물임을 강조했다.

범상치 않은 데뷔작을 내놓은 이 감독은 박찬욱이 키운 걸로 유명하다. 박 감독은 2004년 ‘미쟝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당시 이 감독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을 인상깊게 봤고 자신이 첫 제작자로 나선 이 영화를 그에게 맡겼다.

“미쟝센영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이 감독을 봤는데 두 가지가 맘에 들더군요. 하나는 정식 감독 코스를 밟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직장 생활도 꽤 하다가 20대 후반에 영화의 길로 들어섰죠. 처음부터 영화학을 전공한 사람보다 인문적 소양이나 통찰력이 더 있을 거라 봤고요. 둘째는 맏언니처럼 동료를 잘 챙겨주는 모습을 보니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이 있어 보였습니다.”

박 감독은 곧바로 그를 ‘친절한 금자씨’의 연출부로 불러 현장경험 및 연출 노하우를 쌓게 했다. 박 감독은 같이 일해 보니 자신의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다고 흐뭇해했다.

‘미쓰 홍당무’는 한편의 소동극이자 블랙코미디다. 인물들은 무척 진지한 상황인데 관객은 웃음이 나오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처음부터 이런 영화를 기대한 건 아니다.

“캐릭터와 제목만 있었을 뿐 시나리오나 장르 등 나머지는 모두 끊임없이 변했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다 여기까지 온 거죠. 하지만 주도적인 역할은 이 감독이 했습니다. 제가 씨앗 수준의 아이디어를 냈다면 그걸 잘 자라게 한 건 이 감독이죠.”(박 감독)

“캐릭터만 정해 놓고 이를 잘 살릴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았어요. 스릴러나 로맨스도 생각해 봤죠. 결국 색다른 코미디가 됐는데 만족스러워요. 그런 점에서 ‘미쓰 홍당무’는 철저히 캐릭터 드라마인 셈이죠.”(이 감독)

하지만 너무 여성들의 다툼과 권력 관계에만 초점을 맞춘 건 아닌가. 영화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속설을 재생산하는 혐의가 있다. 왕따를 수용하는 자세에서도 사회적 모순을 개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오류가 엿보인다.

“마지막에 애처로움과 쓸쓸함의 정서를 넣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이 좋아서 현실을 인정하는 건 아니니까. 그보다는 화가 난 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막 싸우는데 그 사이에 낀 남자는 아무 말도 못하는 장면, 그냥 이런 모습을 코미디로 만들면 재밌겠다 생각했죠.”(이 감독)

아직은 ‘감독 이경미’보다 ‘제작 박찬욱’이 더 이슈다. 마치 국내에선 생소한 감독이 만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이라고 홍보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절대 나서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옆에 있어도 이 감독이 절대 묻힐 존재가 아니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관객이든 언론이든 이 감독을 결코 가볍게 보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죠. 무엇보다 영화가 별로였으면 도와 달라고 해도 안 나서죠.”(박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