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ㆍ서양 팩션(faction) 영화를 통해 흥행의 조건을 알아보는 것도 최근 불황의 한국영화계에는 좋은 자료가 될 듯 하다.
'팩션(faction)'이란 역사적인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적절히 버무린 장르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고, 더욱 자유롭다. 탁월한 이야기꾼의 필력이 가미된 팩션은 흥미진진함을 넘어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미국 최고의 팩션은 '다빈치코드'?
미국에서는 소설가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코드'가 국내에 알려진 최고의 팩션이요, 또 팩션영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 얽힌 비밀과 사건을 암호학자 로버트 랭던이 풀어 나가는 추리소설로 내용 중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사라라는 딸을 낳고, 그 후손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혈통으로 이어졌다는 설정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빈치 코드'는 44개 언어로 번역된 세계적인 초베스트셀러로 국내에서도 최장기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이 소설은 톰 행크스 주연으로 영화화돼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폭발적인 흥행성적을 올렸다.
#한국의 '다빈치코드'는 '미인도'
그럼 한국에는 어떤 팩션들이 있을까?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미인도'가 팩션이다.
또 400만 관객을 훌쩍 넘긴 영화 '신기전'(김유진 감독)도 팩션이고, 50만부가 팔린 이인화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영원한 제국'(박종원 감독)도 팩션영화다.
그중에서도 13일 개봉하는 김민선 주연의 '미인도'는 최근 불고 있는 '신윤복 바람'과 함께 큰 화제를 일으킬 팩션영화로 꼽힌다. '미인도'의 팩션 시나리오에 대해 한수련 작가는 이렇게 풀어냈다.
신윤복은 사실은 여자였다는 것. '단오풍정'이나 '월하정인' 등 신윤복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 보면 여성의 필치같다는 것이다. '미인도'의 그녀(?)는 자화상이었다니까, 그런 그가 '미인도'를 그렸다면 신윤복은 필시 여자였다는 것. 또 스승인 김홍도와는 치명적인 사랑을 나눴다고 그는 풀어냈다. 신윤복은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남장을 하고 살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여인이고 싶었다는 것이다.
사실 신윤복과 김홍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기록은 없다. 비슷한 시대에 살았을 뿐이다. 화풍도 달랐다. 신윤복이 야한 그림을 그려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이다. 팩션이기에 가능한 영화다.
#'다빈치코드'와 '미인도'의 같은점, 다른점
그럼 서양의 '다빈치 코드'와 동양의 '미인도'가 같은 점은 무엇일까?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점이 비슷하다. 화가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은 해외를 겨냥하기에 편하다. 화가 영화들은 예술혼을 불태웠던 화가들의 불꽃 같은 생애를 보여준다는 소재의 특이성과 스크린에서 화가들이 남긴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프리다' '까미유 클로델' '렘브란트' '반 고흐' '서바이빙 피카소' 등 화가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예외없이 세계 각국에서 사랑받고 있다. 웰메이드 멜로사극을 지향하는 '미인도' 역시 한국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화가들의 세계를 다뤘다. 이 또한 해외를 겨냥했다.
또 '미인도'가 신윤복의 자화상이라는 설이 영화 '미인도'의 주테마가 됐듯이 세계적인 명화 '모나리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이라는 설도 어찌보면 두작품의 공통점을 논하는 코드다.
그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미인도'가 실제 화가가 살던 시대를 상상의 세계로 보여준다면 '다빈치 코드'는 화가가 남긴 단서를 토대로 가상의 역사를 추리해간다.
또 '미인도'가 가상의 역사를 찾아 그 시대로 찾아가는 반면 '다빈치 코드'는 현재 시점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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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팩션인가?
영화든 소설이든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대중들은 이제 한때 인기를 끌던 '퓨전 사극'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다. '대체 역사'라고도 불리는 팩션이 트렌드다.
최근 상영한 팩션영화 '신기전'도 400만 관객을 훌쩍 넘기면서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했다. 이는 팩션의 장점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다. '도입부에서 중반부까지 지루하다'느니, '민족주의적 시각이 지나치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팩션의 힘은 셌다. '세종대왕 때 세계 최초로 발명한 다연발 로켓포로 명나라를 물리쳤다'는 '그럴싸한 거짓'(?) 솜씨에 관객들도 매료당했다.
그럼 동양의 '미인도'도 서양의 '다빈치 코드'처럼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같은 팩션영화이자 실존 화가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에 비교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인도'의 흥행은 최근 침체의 한국영화계에 큰 힘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한국영화는 '팩션'의 힘이 필요한 때다.